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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 왕위의 왕, 애정결핍이 불러온 결말

by 진온아빠 2024. 7. 9.

광기로 미쳐가는 폭군과 간신들

조선의 10대 임금이자 폐위된 조선의 두명 중 1명의 임금이 연산군이다. 성종과 폐비윤씨의 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난 연산군은 아버지인 성종이 태종 이방원을 왕으로 받든 한명회 등의 훈구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삼사의 권력이 강해져 성종이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을 왕세자때부터 보아 왔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연산군이 즉위한 그 해부터 광기에 넘쳐 폭정을 일삼아 왔던 것은 아니었다. 첫 해 즉위한 때에는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펴기도 하고 정치에 의욕도 있었던 전도유망한 임금이었으나 삼사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생명을 위해 이른바 선을 넘는 간언을 쏟아내면서 연산군의 심기를 거스렸다. 이를 참고 있던 연산군이 폭발한 시점은 조선 역사상 첫번째 였던 무오사화였다. 삼사와 대립하고 있던 연산군의 신하들이 검증되지도 않은 소문을 가지고 왕의 증조부인 세조를 비방하는 사초를 실었다는 보고를 하여 대립하기만 했었던 삼사의 신하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어머니였던 폐비윤씨의 폐위를 찬성했다는 이유로 갑자사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자신을 제약하고 있던 것들을 두번의 사화로 벗어나며 연산군은 제위 11년만에 광기에 넘치는 폭군이 되어갔다.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은 일대로 실행을 하며, 자신을 비판하고 자신에게 반대를 하는 신하들은 모조리 죽여가며 광기에 넘치는 임금이 되어간다. 연산군이 미쳐가는 과정중에는 연산군의 최측근에서 달콤한 말로 간언을 하고 상황을 조장했던 수많은 간신들이 있었고 이 영화는 그런 간신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희대의 간신

조선의 10대 임금인 연산군 시절, 어렸을적부터 연산군과 친구였던 임숭재가 아버지인 임사홍과 함께 간사한 말과 행동으로 임금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했던 연산군때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는 흥청망청의 어원인 운평과 흥청에 관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운평이란 조선 연산군 때에, 여러 고을에 널리 모아둔 가무 기생을 일컫는 말이고 흥청이란 운평 중 대궐로 뽑혀 온 기생을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연산군은 색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광기어린 임금으로 영화는 그리고 있다. 간사한 말로 임숭재가 연산군에게 권력을 얻기 위해 각 지방에서 1만명의 미녀를 얻기위해 자신을 채홍사로 임명하여 조선 각지의 미녀를 강제로 징집했다. 극중 최악의 간신으로 표현하는 임숭재는 역사적으로 기록이 있는 간신이다. 임숭재는 이를 기회로 삼아 왕위의 왕으로 군림할 계략을 생각해내고 여자라면 천민까지 가릴 것 없이 잡아들이니 조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그러던중 임숭재는 단희를 만나 왕을 홀리기 위해 뛰어난 미색을 갖춘 단희를 간택해 직접 수련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단희에게 임숭재조차 마음을 빼앗겨 최후에는 연산군을 배신한다. 한편 희대의 요부라 불리우는 장녹수는 조선 최고의 명기 설중매를 불러들여 단희를 견제하고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임숭재와 장녹수, 간신들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시작되고, 단희와 설중매마저 살아남기 위해 색을 수련하지만 마지막에는 장녹수가 단희를 살린다. 단희는 운평 중 최후의 1인으로 뽑혀 연산군의 침소에 들던 날 죽일 계획을 세우고 들어가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연산군은 마침내 임숭재에 의해 돼지에게 둘러싸여 죽임을 당한다. 설중매는 주막에서 일하고, 임숭재 또한 살아남아 광대가 되어 연산군을 풍자하며 극은 마무리된다.

연산군 폐위 이후

삼사와 대립하고 연산군을 옹호한 훈구파는 궁중파와 부중파로 나뉘었는데 갑자사화 때 훈구파는 물론 사림파도 대거 화를 입었다. 연산군은 사냥을 일삼고 유희에 빠져 국정에 태만히 하여 재정이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각종 세금과 공납 증가로 인해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거기다가 연산군의 뜻에 반대하면 앞선 갑자사화나 무오사화처럼 대신들을 숙청하는 등 반정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신료들은 본인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반정에 가담해야 했다. 연산군때의 일기를 보면 반정이 일어나기 며칠 전 연산군이 후궁들과 놀다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반정이 일어나리라 미리 예측했다 한다. 이조참판이었던 성희안은 풍자시로 연산군에게 간언을 했다가 종9품 부사용으로 강등되자 박원종을 끌어들여 반정을 모의했다. 성희안의 제안에 따라 박원종이 반정에 참여한 이유는 날이 갈수록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고 패악을 부리며, 박원종 본인을 포함한 우호적인 관계자들까지 연산군이 건드리며 협박을 가하고 짜증을 내기 시작해 박원종은 자신을 포함한 신료들의 미래를 우려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반정에 부중파가 다수 참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지지했으므로 반정 이후 소수의 궁중파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훈구파가 그대로 정권을 잡았다.

의외로 중종반정 당시 연산군은 도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결과를 받아 들였다. 연산군이 있던 궁을 장악한 반정 세력이 옥새를 요구하자 순순히 내주었고 연산군이 교동에 유배될 때도 점잖은 차림새로 나와 순순히 가마에 올랐다고 실록에 나와 있다. 이후 역사서에도 연산군이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거나 저항한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