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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 : 나라의 운명, 병자호란 이후의 정세

by 진온아빠 2024. 5. 23.

 

두명의 충신, 서로 다른 신념

이 영화에서의 주제는 주화파와 척화파는 조선의 주된 학파였던 성리학의 이념간의 대립이라 생각된다.

우리나라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뜻을 전하는 주화파의 최명길은 전쟁의 참화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진다는 생각과 살아있다면 힘든 상황에서도 살아가는 대로 방법이 생기고 백성들과 어렵더라도 사직을 지키고 살아가자는  뜻으로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에 볼모로 끌려갔다왔다가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돌아와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던 소현세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반면,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다"라는 격언처럼 척화파의 김상헌은 명나라와의 군신관계를 먼저 생각하고 명나라외의 오랑캐인 청나라와는 전쟁을 계속 이어가고 죽어서라도 이념을 지키며, 전쟁의 대의는 우리에게 있으니 죽음을 무릎쓰고 싸워 적을 국경밖으로 몰아내자는 의견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의 인조는 조선의 앞날을 걱정서도, 자신과 조선의 사직을 생각하는 어려운 선택의 갈림길에 있던 것 같다.

 

명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조선

1636년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시대의 이야기이다.

명나라 때까지 군신관계를 맺어 살아오던 조선이 청나라보다는 이전까지 군신관계였던 명나라를 우선시하며, 청나라와 마찰을 빗는 등 전쟁의 명분을 주어 전쟁이 시작되었고, 시작과 동시에 압록강을 넘어 빠르게 남하하는 청나라군의 속도보다 신속하게 몽진을 이루지 못한 인조는 강화도로의 몽진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하였다.

조선의 무장과 신하들은 싸움을 회피하거나 패배하여 청나라와의 소모전을 벌일 때까지 시간을 끌지 못했다. 이로 인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의 옆에는 나라를 위해 치욕을 견뎌야 한다는 주화파의 최명길과 치욕을 견디느니 끝까지 항전하자는 척화파의 김상헌이 있었다. 

청군의 강화 조건이 세자를 볼모로 잡는 것이라고 보고하자 인조는 항전을 결의한다. 팔도에 근왕병을 소집하여 남한산성을 구원하라는 격서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김상헌에게 격서를 쓰게 한 후 결사대를 보내지만 발각되고 실패한다.
수리한 조총 등의 병장기들을 가지고 이시백을 지휘관으로 한 전투에서 청군 장수의 목을 베는 등 첫 승전을 올리며 사기를 끌어올린다. 결사대가 실패한 것을 안 인조와 대신들은 격서를 다시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인조의 말에 대화가 오간다. 

청군의 진을 본 이시백의 보고로 최명길은 칸이 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김류와 최명길은 조선의 임금이 보낸 세찬과 소를 가지고 역관 정명수와 함께 청 진영 속으로 들어가면서 청의 진영 상황을 보고 김류는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여보지만 패전한다. 

새해를 맞아 남한산성 안에서는 명나라 황제를 위한 망궐례가 행해지는데, 청군 진영에서는 청 태종이 등장한다. 김상헌은 결사항전을 주장하지만 최명길은 체념한 듯 살 길을 찾기 위해서 항복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올리고 논쟁이 격해지자 인조는 그만둘 것을 명한다.

시간이 지나 최명길이 쓴 항서가 올라오자 조정에서는 답서를 불태우고 역적 최명길의 목을 베라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사는 길을 주제로 논쟁을 벌인다. 인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다.
한편 인조는 최명길과 독대하여 후대에 역적으로 남아도 괜찮겠냐고 묻고, 최명길은 자신이 감당할 일이라고 말하며 김상헌만한 충신이 없으니 후일 궁으로 돌아가더라도 내치지 말아 달라고 한다.

모든 방해를 무릅쓰고 마침내 최명길이 청군 진영으로 출발한다.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청군의 포격으로 인조가 있는 행궁을 비롯해 성 안이 파괴되고 대포 소리에 다급하게 말을 달려 청의 본진에 도착한 최명길은 항서를 칸에게 바치며 항복을 청한다. 인조는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를 바치고, 그 시각 김상헌은 인조가 있는 삼전도를 향해 절을 올린 뒤 자결한다. 굴욕의 항복식이 끝나고 그때의 복장 그대로인 인조와 신하들이 한양 궁궐로 돌아온다.

 

병자호란 이후 정세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와 사대를 끊고 항복한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었으며, 매년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조선은 병자호란의 원한을 잊지 않고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지만 효종 사후 북벌론이 사그라들었다. 청나라의 양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조선과 청은 커다란 마찰 없이 비교적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현종 시절 조선이 을병대기근이 들어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자 청나라의 황제 강희제가 직접 지시해 5만석을 보내주기도 하는 등 여러 편의를 제공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숙종시절 백두산 부근의 영토를 둘러싸고 청나라와 조선은 분쟁이 일어났지만, 조선과 청나라는 군사적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담판하여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병자호란 직후에 청나라가 조선에 고압적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적인 외교 관계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조선왕조는 청에 대해 애증이 있었던 듯하며,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한 원한은 구한말 고종 때까지 잊지 않았지만 청나라의 강건성세를 지켜 본 영,정조대 이후로는 사대부들도 청나라가 정통 중화왕조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당장 조선에 일본과 서방과 위협이 증대하자 오랑캐로 무시하면서도 상국으로 여기던 청나라에 자문을 구했다. 조선이 서양세력과 최초로 맺은 근대적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도 청나라 북양대신인 이홍장의 자문을 받고 진행된 것이다. 또한 조선 조정은 내정의 문제인 동학농민전쟁까지 청나라의 개입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톈진조약에 의거해 일본이 개입하게 되면서 조선왕조 멸망의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