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자식의 목숨을 끊고 전투에 임한 계백
계백의 역사적으로 보여졌던 실제성격과 영화에서의 성격은 차이가 있지만 영화에서는 "밥은 역시 전쟁터에서 먹는 밥이 젤루 거시기혀." 라는 대사에서와 같이 알 수 있듯 FM에 부합하는 모범적인 군인으로 묘사된다. 영화의 상황상 김유신에 비해 젊은 사람의 분장을 하고 있지만 그는 최소 20년은 넘게 전장에서 구른 베테랑중의 베테랑이다. 전투 전 휘하 장수들에게 손자병법의 구절을 인용하며 훈시를 하고, 화랑 관창의 계속되는 자살성 돌격을 보고 김유신의 의도를 어느정도 간파하는 등 지장의 면모도 있으나 잔꾀를 부리기보단 정직하고 우직하게 싸우는 것이 그의 성미에 맞는것 같다. 실제 역사에서 계백은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속담에서와 같이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자신이 전투에서 죽을 것을 직감적으로 예상하고 자신이 없이 남겨질 가족이 전란의 시기에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미리 알고 전투에 앞서 자신의 가족들의 목숨을 끊고 전투를 임하는 자세 속에서 계백장군의 필사항쟁이 느껴진다. 6세기 무왕께서 백제의 수도를 익산으로 옮기시고 마지막 왕인 의자왕때 백제의 정세를 보면 나라의 재정이나 권력을 가진 귀족을 배제하고 자신의 최측근들을 대거 영입하여 귀족들의 반발을 서게되고 이때 당나라의 참전을 알게되면서 계백은 5천명의 군사로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군사를 막으라하니 백제의 미래가 바람 앞의 등불이고 백제가 기울어져 간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5천의 군사로 5만의 군사를 막아야만 한다.
5만 신라군 총사령관으로 나선 김유신은 작은 조카이자 신라 왕자인 김인문의 시건방진 태도와 통역+당나라 소정방의 어거지로 인해 말도 안 되는 기간 내에 황산벌을 지나 당군의 군량미를 공급해야 하는 보급계인 일명 '살배달' 상황에 놓인다. 덕물도 앞바다까지 당나라에게 조공을 받치기 위해 운반하려면 백제군을 뚫어야 하는데, 백제에는 ‘김유신’의 영원한 숙적인 ‘계백’이 버티고 있었다. 당나라의 배들이 서해 덕물도 앞바다에서 닻을 내리자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중신들은 당나라가 쳐들어오는 건 아닌가하고 긴장한다. 백제의 신하들은 애써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러 가는 것일 거라고 자신만의 생각을 하고 있던 그들은 신라군이 남하하여 탄현으로 오고 있다는 전갈에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려는 것임을 확신하며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나 의자왕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을 배제하고 최측근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귀족들의 적개심을 샀고, 귀족들은 그런 왕에게 자신들의 군사를 내주지 못하겠노라 엄포를 놓는다. 다급해진 백제의 마지막왕인 의자왕은 자신의 마지막 충신 ‘계백’ 장군을 부른다. 무언의 술 다섯 잔 속에 의자왕으로부터 황산벌 사수를 부탁받은 계백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면서 싸우기 위해 자신의 일족을 모두 죽이고 황산벌로 향한다. 계속되는 전투를 넘나드는 5천 백제군과 5만 신라군은 의외로 4전 4패로 백제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당나라와 약속한 7월 10일이 다가온다. 그러나 김유신과 계백 간의 인간 장기전투에서 계백이 자신만의 전투기밀인 "거시기"의 진실을 스스로 밝히게 되면서 김유신은 관창을 비롯한 화랑의 자폭 돌격과 진흙을 통해 군복을 벗을 수 없게끔 백제군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방식으로 백제군 스스로 갑옷을 벗게 만든 후에 총공격을 감행, 백제군을 전멸시켜 승리를 거뒀고, 결국 계백은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뒤 마지막에 부인과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김흠순에게 참수당한다.
황산벌 전투 이후
신라군을 약속된 합류 일자보다 고작 하루 늦춘 황산벌 전투의 패배로 나당연합을 만드려고 하는 당군과 신라군의 합류를 저지하려던 백제의 전략은 실패했고, 백강으로 들어오는 당군에게도 대패하면서 결국 당군과 신라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 앞에서 합류했다. 하지만 약속된 장소로 합류하여 출발하려는 신라군의 합류 일정이 늦어지자 당군은 신라의 장수 김문영을 처형하려고 하는 등 당군에서는 신라군에 압력을 넣었으나 신라의 총대장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강경대응하면서 일단 알력싸움은 무마되었고, 얼마 되지않아 의자왕은 결사항전을 각오하고 부여성에서 탈출하여, 방어에 조금 더 유리한 성 웅진으로 달아났으나 예식진의 배신으로 사로잡힌다. 결국 백제는 황산벌 전투를 계기로 수뇌부가 붕괴하여 멸망한다. 백제의 지방군은 예식진의 배신 직후 백제 부흥군으로 다시 일어났다. 무엇보다 당시는 현지보급이 중요한 시절이었다. 부여 일대 유적지에서는 군창터에 불에 탄 탄화미가 발견된 바 있다. 다만 660년의 상황은 백제 전국 각 지방의 세력이 온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오직 웅진, 사비 등 백제의 수도권만 격파 당한 상태였다. 흑치상지 열전에서 백제부흥군으로 3만명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처럼 여전히 백제 유민들은 싸울 전력이 남아있었고 이들은 이후 3년간 일본에서 돌아온 왕자 풍왕을 중심으로 나당연합군에 항전했다. 실질적으로 백제의 전력이 완전히 붕괴한 것은 백강 전투로,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 등 조선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의자왕 다음으로 풍왕이 마지막 왕이고 백제의 진정한 멸망은 663년이라고 봤다. 이렇게 볼 경우 황산벌 전투는 백제의 마지막 불꽃이 아니라 백제 멸망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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