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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 :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 임오화변과 정조

by 진온아빠 2024. 5. 23.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바란 아들

영화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아들.

조선의 임금이란 본래 백성들의 어버이로써 정치적인 식견과 학문이 높아 만백성이 우러러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영조의 기대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 사도세자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세자로 생각하는 아버지 영조의 기대에 차지않았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게 된 순간부터 아버지와 관계는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세자가 생각대로 국사를 결정하면 영조가 뒤에서 보다가 마음대로 결정하냐며 트집을 잡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면 제대로 못하니 대리시킨 보람이 없다며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준다.

또한 능행 중에 비가 오자 영조가 말도 안되는 면박과 함께 행차에서 쫓겨나 길에 쓸쓸하게 남겨지는 등 계속 갈굼받다가 뒤주에서 굶으면서 아들인 세손의 울음소리에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안타까움만 자아낸다.

이렇게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던 아들은 아버지의 계속된 학대와 언어폭력으로 서서히 미쳐가다 살해까지 당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이런 일들이 지금도 뉴스에 한번씩 보이는데 친부, 친모가 어린 아이들을 폭행 등으로 학대를 하고 결국 죽이는 소식이 가끔 전해져 안타깝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개인적으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 한번이 우리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며, 그 아이들의 인생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이 되었으면 하는 아버지와 아들이고 싶었던 아들

첫째날, 의복을 갖춰입는 영조에게 영빈은 세자의 죄를 고하며 세자를 대처분할 것을 요청한다. 영조는 창덕궁으로 들어오며 세자를 호출한다. 창덕궁 인정전 앞 계단 위 영조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있는 세자. 어제 있었던 사실까지는 언급하지 못한 영조는 세자 앞에 검을 던지며 자결할 것을 촉구하다가 뒤주를 가져오라하여 안에 들어가라 한다
둘째날,  영조는 승지에게 세자를 평민으로 강등하라는 교지를 쓰라 명하나 승지들이 쓸 수 없다며 거부하자 이에 영조는 자신이 직접 교지를 작성한다. 이후 세자를 모시던 사람들이 참수당하는 가운데 김상로가 영조의 교지를 세자에게 읽어주자 자신의 생모 영빈 이씨가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되며 절망한다.
셋째날, 깊은 밤, 정신이 쇠약해진 세자는 지네들이 귀주로 들어오는 환상을 보게되고 견디다 못한 세자가 뒤주의 벽을 부수고 빠져나와 궁궐 후원으로 달려 연못에 몸을 던지고 몸부림을 친다. 마침 입궐해 있었던 장인과 처숙부가 달려와 세자를 연못에서 건져올리려 하지만 세자는 차라리 사약을 내려 빨리 나를 죽이라고 광분한다. 사실을 알게 된 영조가 세자를 다시 뒤주에 가두라 명한다. 
넷째날, 무더운 여름 날씨. 뒤주 속에서 아직 물 한방울 마시지 못한 세자는 극심한 갈증을 말하며 물을 가져오라며 고함을 지른다. 그러자 뒤주를 지키던 병사들은 물을 끼얹었고 세자는 틈새로 새어 떨어지는 물을 마신다.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세자는 소변이 나오자 부채로 받아 마신다. 그러다 문득 그 부채가 자신이 아들을 위해 그려줬던 청룡의 모습이 담긴 부채라는걸 인지하고 통곡한다.
다섯째날, 세자를 풀어주지 않는 영조의 행보에 혜경궁 홍씨는 세손을 보호할 방도를 찾으려고 하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는 한편 홍인한은 제 살길을 찾아 새 중전인 정순왕후를 찾아가지만 간택 시절 총명한 모습을 보였던 정순왕후는 영조를 두려워하는 모습만을 보인다.
여섯째날, 뒤주를 흔들어 세자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세손은 세손빈과 함께 물을 떠다드리려 하지만 내금위장이 그들을 가로막는데, 세손은 협박하며 명하고 뒤주로 다가간다. 세손은 슬퍼하며 물을 가져왔다고 세자에게 소리치고만 있는다. 그러자 영조가 세손을 끌어낼 것을 명하고, 이에 세손은 영조에게 자식이 아비에게 물 한잔 드릴 수 없냐며 통곡한다. 이 때 아직 살아 있었던 세자는 힘없이 뒤주를 두드리며 살아 있다는 신호를 아들에게 보내고, 세손은 더 구슬피 운다.
일곱째날, 영조와 사도세자는 마침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간의 진실된 이야기를 나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뒤주를 연 영조와 영빈 이씨는 아들의 사망을 확인한 뒤 오열하고 혜경궁 홍씨 역시 눈물을 흘린다. 허나 대외적으로는 역적을 처단한 것이기에 영조는 경희궁으로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울리라고 지시한다.
이후 세자의 장례가 진행되면서 영조는 세자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준다. 아버지의 장례식조차 참가할 수 없다는 사실에 통곡하는 세손에게 혜경궁은 네가 보위를 이어받아야 아버지의 한을 풀어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세손을 진정시킨다.

14년 후 영조가 승하한 1776년 마침내 정조는 보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참배하며 미처 그때 드리지 못했던 물 한잔을 드리고 오열한다. 

 

임오화변 이후

영조가 세자를 역도라는 명분으로 죽인 상황에서 세손을 세자의 아들로 규정하고 방치했다가는 연좌제 논리로 인해 세손조차 책임을 피할 수 없어 왕위를 계승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형식상 사도세자와는 무관하게 만듦으로써 세손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보호하려고 하였다.

임오화변 이후 영빈의 장례를 치를 때 영빈은 세손이 효장세자의 장통을 계승하게 했다는 명분으로 인해 공적으로는 세손의 할머니가 아닌 할아버지의 후궁으로서 지위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최상급 장례용품을 사용하는 등 장례는 나름 정성을 들여서 제대로 치러 주었다. 이는 당시 예조판서 겸 호조판서 정홍순이 "최대한 예를 갖춰 장사지내라"고 어명으로 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1777년 정조가 "장례 당시에 사용한 물품을 검열하겠다"고 하자 정홍순이 견본을 보냈고 정조는 아버지를 제대로 장사지내 준 것에 대해 감격하여 특별히 정홍순을 우의정에 제수했다. 정조는 즉위한 뒤 아버지를 임금으로 추존하고자 했지만 선왕 영조가 영조 40년(1764년)에 한성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를 이곳에 옮겨 짓는 등의 예우를 보인 다음에 정조에게 "네 아비에겐 할 만큼 했다. 단 한글자라도 더 높인다면 할아비를 잊은 것으로 알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정조가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즉위 직후의 연설에서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선왕께서 나를 효장세자의 뒤를 잇도록 하셨으니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함부로 추숭을 말하는 자는 마땅히 처벌하겠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조가 사도세자의 신원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곧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격을 높여 고쳐 부르고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더해 올렸는데 이때 정조가 친히 편액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월근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