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평양성 : 강대했던 고구려의 멸망, 삼국을 통일한 신라 이후

by 진온아빠 2024. 5. 23.

 

신라의 명장, 김유신

역사적으로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삼국시대 진평왕부터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의 문무왕때까지 5명의 왕 옆에서 왕을 직접적으로 보좌하고 백제의 맞수 계백장군과 고구려의 남건장군과의 일생일대의 건곤일척의 전투를 통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김유신장군의 일생은 법흥왕 19년인 532년 신라에 항복하여 진골이 된 금관가야의 후손으로 성골 다음인 진골출신으로 화랑에 편입되었으며, 진평왕시기에 화랑에 속해 18세때 보검을 들고 열박산에 들어가 검술을 익혀 화랑의 지도자인 국선이 되었다. 629년 아버지 김서현과 낭비성 전투에 직접 참전하였으며, 아군의 형세가 불리할 때 살신성인의 모습으로 본인이 직접 적진에 들어갔다나오며 적장을 베는 전공을 세웠다. 642년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그 당시 신라의 국력이 약소해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신라의 사신자격으로 고구려에 간 김춘추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김유신이 김춘추를 구출하기 위해 1만의 군사를 대동하고 고구려쪽으로 북진을 하여 김춘추를 구원하는 등 문과 무의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화랑출신이었던 관창과 같은 다른 신라의 화랑을 보면 18세에 전투에 나가 공적을 세우는 등 이른 시기에 공적을 세웠으나 김유신은 642년 30대중반의 나이에 공적을 세워 대기만성형의 인물로 보인다.

고구려의 멸망과 나당연합군의 와해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가 멸망한 지 8년 후, 신라는 나당연합과 고구려의 싸움을 시작으로 평양성 전투를 위해 백제 의 옛 영토에서 병사들을 강제로 징집한다. 고구려와 신라, 당나라가 삼국의 협상이 깨진 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쳐들어갔다. 하지만 전쟁 초기에 연개소문이 화살에 맞아 죽으면서 고구려와 나당연합의 전쟁은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과 남건의 권력투쟁으로 변한다.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정치를 형 남생에게 맡기고, 군사지휘권은 동생 남건에게 맡겼으나 서로 주장하는 내용이 달랐다. 남생은 협상해서 항복하자고 하고, 남건은 아버지를 닮아서 투사 체질이라 끝까지 항전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신라군 진지에서는 황산벌전투에서 혼자만 살아남았던 거시기가 "전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신라의 병사들에게 전달해준다. 백제의 병사들이건 신라의 병사들이건 누구나 다 이번 전쟁에서 어느편이 이기냐에 관심은 없고 그저 살아남아서 가족을 다시 보고 싶을 뿐이다. 다음 날 전투에서 완강한 고구려의 저항을 당나라군는 신라 병사들의 목숨을 앞세워 공격해왔지만, 꿀벌을 이용한 신무기를 사용해서 고구려의 대승으로 결정됩니다. 선봉에 섰다가 도망간 신라군들에게 당나라 장군이 혹독한 벌을 내리는데 그것은 도망간 전우를 직접 때려죽이라는 것이었다. 고구려 평양성 전투 후 평양성 성내의 보장왕은 승리를 기뻐했다. 그때 남생이 와서 이 틈에 당과 협상하여 항복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남건이 화가 나서 남생을 포박한다. 때마침 당나라군 진영에는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찾아와 있었는데 당나라군의 증원군을 보내달라는 횡포에 갑자기 노망난 것처럼 미친 짓을 해서 시간을 늦췄다. 신라군으로 돌아간 김유신은 고구려를 당나라가 혼자서 독차지할까 봐 걱정을 하며 그렇기에 신라입장에서는 당군을 스스로의 힘으로 몰아낼 힘도 없었기에 고구려가 당나라군을 더 많이 죽여줘야 했다. 김유신은 남건에게 쌀가마니를 보내서 좀 더 버텨 싸우라고 이간질을 시키고 그 사이 남건은 남생을 투석기로 당나라 진영으로 추방해버렸다.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당의 요청인 신라의 군대를 더이상은 안 보내자 당나라 지휘관은 화가 났으며 신라 왕에게 마치 자신의 부하처럼 직접 군대를 몰고 오라고 명령을 하고 군대에 먹일 식량이 없으니 전쟁도 불가하다며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보낼 마음이 없는 남건은 후퇴하는 적을 쫓아 기마병과 출격하지만 당군의 매복작전으로 고구려군은 치명타를 맞는다. 당나라는 남생에게 고구려 멸망 후 요동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런 남생의 활약으로 결국 보장왕이 항복을 하고, 평양성 전투는 끝난다. 그러나 승리한 당군은 바로 남생을 배신하고 결국 오로지 당나라에게만 이익이 되는 전쟁으로 끝난다. 영화 평양성 결말은 고향으로 돌아온 거시기와 아이를 가진 갑순을 보여주는데 백제와 고구려가 남북으로 갈려서 오래 싸웠던 탓인지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냉랭하게 대하지만 이에 반격하는 갑순이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평양성 전투 이후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신라는 나당연합군이 생기고 난 후 지금까지 참아왔던 당의 야욕과 하대에 더는 참지않고 맞서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와 고구려 부흥세력의 고연무가 지휘하는 연합군 2만명이 전격적으로 북진하여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오골성을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물론 이 전투는 북과 남에서 닥칠수 있는 양면전쟁 위험과 신라에서 멀리 떨어진 원격지 요동을 오랫동안 점령할 순 없었고 몇 달간의 일시적 점유였지만, 요동을 공격한 이 공격으로 인해 신라는 나당전쟁 초기의 주도권을 가져왔고 북쪽에서 시간을 번 동안 671년까지 당군이 지키고 있던 백제 고지를 대부분 영토화하였다. 신라의 설오유 부대는 정병 1만여 명으로, 고구려 부흥세력인 고연무 부대의 1만여 명의 병사와 연합으로 요동 공략 작전에 나섰다. 이들은 670년 3월 점령했던 요동에서 4월 4일 당나라 소속의 말갈군과 교전하게 되는데, 이 때 야간 전투를 수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당군이 계속 몰려들자 전투에서 물러나서 백성을 지켰고, 수성전을 수행하여 승리한 것이다. 이렇게 신라와 당나라는 서로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 연합군을 파기하고, 신라는 고구려부흥세력과 한민족이라는 기치아래 함께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공동전선을 펼치면서 나당전쟁을 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