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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대들 : 풍문조작단,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

by 진온아빠 2024. 5. 29.

자신의 과오를 덮고 싶던 남자

세조는 세종의 차남으로 조선의 5대 임금인 문종이 어려서부터 병약하고 세자빈을 두번이나 바꾸고 새로 후궁을 들이면서도 14년동안 아들을 보지 못해 내심 자기자신이 임금으로써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을 세조에게 단종의 존재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단종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선위할 대상이 생기며 세조는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했을 것이고 이것이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는 일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에게 계유정난으로 선위받아 자신 스스로가 조선의 7대 임금으로 선위된다. 이 때 단종에게 양위받은 뒤 군으로 봉하나 실상은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사육신과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책임을 져야하는 주체가 생겨 이를 이유로 단종을 죽였다. 자신 스스로가 피로 이은 종묘사직이라 그런지 자신의 과오를 씻어내고 싶었을 것이고 이는 즉위 후 백성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법을 바꾸거나 훈민정음으로 된 책을 발간하는 등의 방법으로 과오를 씻고자하였다. 하지만 계유정난을 함께 한 자신의 부하들이 각종 폐악질을 일삼고 권력의 중심을 꿰고 있으나 세조는 자신의 심복을 한명회 등을 처단하지 못해 왕권을 약화시켰다.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

자신의 과오를 덮고 싶은 세조는 자신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이야기책의 원본을 찾지만 행방이 묘연하다. 세조의 최측근인 한명회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세조가 본래는 하늘의 뜻이었다고 백성들에게 알려달라며 미담을 만들라는 명을 하달하려고 광대패를 찾는다. 이를 받아들인 광대패는 일을 시작하는데 첫번째로 조작한 풍문은 정이품송이었다. 정이품송의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세조의 권위가 올라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명회는 정이품송의 소문을 흡족하게 생각하고 광대패에게 더욱 정진할 것을 부탁하는데 덕호는 이제는 공짜로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한명회는 결국 죽을때까지 함께 하자면서 덕호가 말한 거처와 노비의 신분을 벗는 면천을 수락한다. 본격적으로 풍문을 조작하기 시작하는 광대패, 광대패의 활약이 극에 달했을 때 한명회는 세조의 용안에 종기가 나고 몸 전체로 퍼졌는데 약도 소용없고 어의들조차 손을 놓은 상황을 걱정하는 백성을 안심시키자는 부탁을 한다. 이를 기회삼아 덕호는 벼슬을 요구한다. 작전은 대성공했고 광대패는 정구품을 하사받는다. 그런 어느 날 한명회로부터 다음 지시를 받는데 덕호에게 육신의 역이라는 책이 전해진다. 하지만 원각사를 증축하라는 명이 떨어져 주변 마을사람들이 쫓겨났고 덕호는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한편 한명회는 왕을 없애고 공신들의 세상을 열기위해 덕호에게 마지막 풍문조작을 명한다. 덕호는 이 사실을 왕에게 고하지만 한명회는 회맹을 열었고 세조가 세자에게 양위를 하고 세조는 더이상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리고 화살을 광대패에게 돌리고 덕호와 팔풍이의 목을 메다는데 바로 그때 육신의 충 겉표지가 나타났고 광대패의 마지막 풍문조작이 실행되고 성공한다. 그 후 세조가 일어나 지나간 과를 공으로 덮겠다고 말하고 덕호는 육신의 충 원본을 절에 맡기고 널리 알려달라고 말합니다,

세조 즉위 이후

세조가 단종에게 양위받아 즉위했을 때의 나이가 39세였다.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명하였다. 한편으로는 태종처럼 6조 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걷는 만큼 쓴다는 양입위출의 원칙아래 효율적 정부운영을 위한 재정-예산 시스템인 공안-횡간과 같은 여러가지 제도를 재정비해서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다졌다.군사적으로도 업적을 남겨서, 문종의 5위 진법 사상을 계승하여 중앙군의 편제를 바꾸었으며 지방에 전국 55개의 진을 설치하여 진관 체제를 마련했다. 물론 이는 세종대왕 때부터 정비된 군사 제도의 결과인 면도 있다. 군사를 정비하여 1460년에 신숙주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크게 들쑤시고 돌아왔고, 이시애의 난 직후에는 남이, 강순 등으로 하여금 태종 - 세종대왕 시대부터 조선 변경에서 골치를 썩인 이만주를 참살하는 개가를 올렸다. 세종의 공법에 기반한 양전도 세조때부터 시작되어 경기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순으로 세조 7년(1461년) 세조 8년(1462년) 세조 8년(1462년) 세조 9년(1463년) 이렇게 이루어졌다. 오가작통에 기반한 호적, 호패제 강화로 한국사 거의 최초로 전국적 인구 조사에 성공했다. 최초의 조직적인 지방 군사 지휘 체계인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처음으로 방위 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을 5위 제도로 개편하였다. 군제를 확정하고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에 거진을 설치했다.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 백성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