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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의 남자 : 질투와 열망, 연산군 이후

by 진온아빠 2024. 6. 6.

삶 자체가 비극인 광대

주인공인 장생은 자신의 재능과 카리스마를 통해 광대를 이끌고 권력자들을 풍자하는 공연을 선보이며 놀이패로써 성공적인 입지를 구축해가는 실력자다. 그러다 왕을 조롱한 죄로 갇히고 왕의 웃음을 얻지 못한다면 죽을 위기를 겪지만 동료의 도움을 받아 왕의 웃음을 얻게 되어 목숨을 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유로운 영혼과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며 성장한다. 조선 연산군 때 모든 것은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 왕의 것이었으나 그런 왕도 자신을 지켜보며 억압하는 신하들로 인해 궁궐 밖으로 함부로 이동하지 못 하고 자신만의 자유를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더욱 강하게 소유하고자 열망했던 광대들의 자유를 가지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 약자일 수 밖에 없었고 사회의 최하층민인 천민으로써 위장자들의 놀이를 위해 희생할 수 밖에 없었던 광대들의 피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암시한다. 광대가 아니면 그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자유로운 영혼은 비단 조선시대의 왕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라고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 모두가 바라는 욕망

사당패에서 공길에게 양반들에게 일종의 성상납을 시키는 식으로 밥을 벌자, 보다못한 장생은 공길을 데리고 도망치다가우두머리를 죽이게 되고 한양으로 올라간다. 한양에 도착한 그들은 광대판에 난입해서 재주로 찍어 눌러 합세한 후 왕을 주제로 광대극을 벌인다. 환관 김처선에게 들켜 왕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잡혀가 매질을 당하던 장생이 "우리가 왕을 웃긴다면 모욕이 아니다"라고 하며 왕 앞에서 광대극을 벌이게 해달라고 외친다. 장생의 예상과 달리 왕 앞에서 펼쳐진 광대극은 긴장한 육갑, 칠득, 팔복의 실수 연발로 좌중을 싸늘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 때 뒤에서 보고 있던 공길이 애드리브로 장생과 합을 맞추고, 그 모습에 만족한 연산군이 파안대소를 터뜨린 후 저들을 궁에 두고 자신이 원할 때마다 즐길 수 있도록 하라며 명령한다. 그런 연산군에게 중신들이 반대를 하고 연산군의 충신 김처선은 왕을 달랜 후, 광대들을 이용해 중신들의 기세를 꺾을 계책을 세운다. 전국의 재주 있는 광대들을 모은 장생과 공길은 뇌물을 받고 관직을 사고파는 탐관오리를 풍자하는 연극을 벌이고, 연산군은 그 연극을 보며 즐거워하지만 중신들은 연극을 보며 불편해하기만 한다. 한편 김처선은 장생을 불러 중국의 경극을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장생은 왜 자꾸 연산군이 공길을 부르는지를 물으나, 김처선은 전하가 누구를 찾으시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며 쏘아붙이고 나간다. 장생은 공길에게 경극을 보여준 후, 우리는 광대지 시키는 대로 깝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며 여기서 나가자고 얘기하지만, 공길은 반대한다. 해당 경극은 태후와 후궁들의 모함으로 왕후가 사약을 받아 죽는다는 내용의 경극으로, 폐비 윤씨 사건을 연상케 하는 경극이었다. 장생은 돌아온 공길에게 "어차피 양반한테 팔아먹던 몸뚱아리, 왕한테 파는 게 낫다는 것이냐"라며 공길을 추궁하고 공길과 다투며 둘의 사이는 틀어진다. 연산군이 공길에게 종4품의 벼슬을 받은 기념으로 연회를 열어주려하지만 중신들의 계략으로 연회 대신 궁 후원에 동물 가면을 쓴 광대들을 풀어 사냥놀이를 하자고 제안하고 두 대신은 왕과 떨어진 공길에게 실제 화살을 쏴서 죽이려 하지만 공길을 보호하기 위해 난입한 육갑이 대신 화살을 맞고 죽게 된다. 궁녀를 대신 죽이라고 말한 연산군은 공길이 실제로 화살을 쏜 것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기절한 공길의 몸에 몇 번 머리를 박다가 거칠게 키스한다. 결국 궁을 나가려고 하던 찰나에 궁을 나가지 말라며 칼까지 겨누는 공길과 그 칼을 빼앗아 줄을 잘라내려고 실랑이를 벌이던 장생은 공길에게 향한 누명을 대신 뒤집어쓴다. 김처선이 장생을 몰래 빼주며 공길을 버리고 도망가도록 해주고 중신들을 걷어내고 연산군이 세상을 바로 보도록 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정작 왕은 공길에게 눈이 멀었다고 직언한다. 직언으로 분노한 연산군은 김처선에게 나가라며 눈앞에 띄지 말라고 외친다. 김처선에 의해 풀려난 장생은 연산군 앞에서 줄타기 공연을 하며 연산군을 희롱한다. 이때  연산군이 쏜 화살을 피하다 추락, 이후 양쪽 눈이 인두로 지져지는 형벌을 당하게 된다. 눈이 먼 채로도 줄타기를 완벽히 하며 타령을 늘어놓는 장생을 본 공길은 울먹이며 달려와 장생의 반대편에 서고, 장생은 눈이 먼 상태에서 공길의 소리를 듣고 서로 대화한다. 줄을 타는 순간, 연산군을 폐위하기 위한 군사들이 들이닥친다.

연산군 이후

왕자 시절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이 태어난 후엔 친아들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 상대적으로 홀대했을 수 있다. 성종의 첫 아들이라고는 하나, 미워했던 며느리의 아들이니 인수대비의 냉대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왕인 성종은 세자의 재능을 총애하고 자신에 의해 엄마 없이 자라는 아들을 애틋하게 여겼는지 세자가 수업을 종종 빼먹었음에도 세자의 스승들을 나무랐을 정도로 애지중지 했다. 실록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기사는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가 없었기에 조카인 연산군을 자기 아이처럼 돌봐줬을 가능성이 높은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 대한 야사 등을 비롯하여 유부녀들을 적지 않게 탐했다는 이야기와 장녹수가 왕을 어린애 다루듯이 꾸짖고 나무라면 오히려 기뻐하고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산군은 적어도 갑자사화 전까지는 이렇다 할 광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정사도 잘하고, 백성들도 성종 대와 다르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다만 갑자사화 이후에는 그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산군의 광증 이유인 폐비 윤씨의 일은 중신들의 숙청을 단행하기 위한 빌미로 철저한 계획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이전의 행동들은 모두 왕권이 약했던 시기였다. 이렇게 보면 임사홍 발언에 의해 어머니의 죽음을 처음으로 안 척 행동을 하고 생모였던 폐비윤씨를 추숭하고 사초 문제를 이용해 날뛰는 대간 잡기(무오사화)를 한 후 수년간 눈치를 살피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갑자사화 이 단계 모두가 권력과 정통성을 강화하는 책략이었다는 것이다. 왕은 자기가 나름대로 계획세워 정통성과 명분을 계산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