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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랏말싸미 : 한글의 시작, 한글 창제의 또 다른 해석

by 진온아빠 2024. 5. 28.

훈민정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앞선 천문에서 만나뵈었던 세종과 또 다른 세종, 조선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성군이라하면 당연 세종대왕이 떠오를 것이다. 조선의 임금 중 위대한 업적이 많아 대왕이라는 수식언이 붙는 임금이 세종뿐이다. 천문에서의 장영실과 더불어 각종 기술들을 발명하며 나라의 부국강병을 보고 백제,신라,고구려의 삼국시대부터 조선의 태조까지 위정장들만이 사용하였던 문자를 사용했다. 문자를 위장자만 사용한다는 것은 지식을 독점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권력 또한 독점할 수 있다. 세종은 특수계층만이 문자를 누려 권력을 독점하려는 환경에 맞서 '모든 백성이 문자를 읽고 쓰는 나라’를 꿈꿨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문자였다. 이는 권력의 중심에 서는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존재가 권력의 배분이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다. 또한 세종이외의 후대 임금들은 다시금 명나라의 글인 한문을 중시하면서 한글은 백성들이 사용하는 문자로 전락하였으나 세종의 이상을 현실로 만든 임금과 독점적인 권력을 지키려는 세력에 맞서 세종의 명대로 글을 만들었던 집현전의 일부학자들, 그리고  중국과 다르게 새로 태어난 문자를 익혀 퍼뜨렸던 궁녀들까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문자인 훈민정음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한 대왕부터 말단 궁녀까지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글자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나랏말싸미 듕귝에 달아 

세종은 지식을 독점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권력 또한 독점하고자 했던 신하들에 맞서 신하들은 모르게 ‘모든 백성이 문자를 읽고 쓰는 나라’를 꿈꾸며 조선의 고유한 언어를 만들려 하지만 중국의 각종 언어학 서적을 섭렵한 세종에게도 새 문자의 실마리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 번번이 한계에 부딪힌다. 이에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을 찾던 중 팔만대장경을 지키는 해인사 신미 스님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된 세종은 소리문자에 해박한 신미스님의 도움을 받아 불경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리글자인 산스크리트어를 바탕으로 훈민정음의 소리글자로 방향을 바꾸어 창제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먹고 살기도 벅찬 백성들이 배워서 언어를 사용하려면 무조건 쉽고 간단해야 한다는 새문자의 원칙 앞에 쉽게 길을 찾지 못 하고 설상가상으로 조선 왕조로 인해 집안이 멸문한 신미스님의 과거는 유교 국가의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세종과의 끊임없는 마찰을 빚는다. 소리글자에 초점을 맞춘 훈민정음은 백성들의 눈높이에 맞게끔 쉽게 창제한 언어는 이를 반포하는 과정 중에도 어려움에 봉착했으며  그 당시 글을 읽고 쓰는 것만으로도 높은 신분을 유지했던 많은 신하들은 훈민정음의 반포를 좋게 볼리 없었다.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세종은 서문을 작성한 뒤 훈민정음을 108자로 만들어 소헌왕후의 천도제를 유학자들은 반대를 하는 와중에 시작을 하고 그 곳에서 나오는 노래를 통해 신하들은 세종이 불자가 되었고 이단에 홀려 망한 고려라며 수군거린다. 그렇게 세종과 신하들의 갈등이 심화되어 갈 때 천도제에 모였던 궁녀와 신하들에게 신미스님은 조선에 언문을 퍼트리자고 이야기한다. 세종은 천도제에서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에 대한 책을 올려두고 절을 하고 자신은 해준게 없다며 신미스님에게 마음을 전하는데 신미스님은 이미 많은 것을 해주었다며 108번뇌를 뜻하는 훈민정음 서문을 이야기한다.

세종 한글창제 이후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많은 서적들의 번역과 간행이 이루어졌는데 서적의 간행을 위한 금속활자 또한 한자활자와 함께 만들어졌다. 세종 때 사용한 계미자활자를 이용하여 서적을 간행했을 것으로 보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와 서적은 세조 때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인 을해자이며 이 금속활자를 인쇄한 '농엄경언해'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세종의 아들인 수양대군은 세조가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던 까닭에 속죄하려는 마음으로 '월인석보상절'을 저술하는 등 한글의 보급과 불교 경전의 번역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조는 1461년네 불경을 번역하고 간행하던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많은 불경을 한글로 번역했는데 지금도 이 당시에 번역된 불경언해본들이 많이 남아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성리학을 공부했던 당시의 유학자들은 한글을 크게 배척한 덕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유학자들은 생각한 것만큼 한글을 배척하지는 않았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어린이들이 쉽게 유교경전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한글주석이 달린 유교경전이나 학습서, 옛 한시 등을 발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초기에는 일반백성들이 성리학 이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국가 주도로 사서삼경 등을 한글로 번역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 양반자제들이 유교경전에 쉽게 입문할 수 있도록 주석을 달아서 사용한 학습교재로서 많이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