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약한 왕자
영화는 왕자와 거지의 모티브를 기본으로 세종의 시대적 설정을 가지고 영화를 제작하였다. 세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아들 이방원인 태종, 그런 이방원이 제1,2차 왕자의 난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왕권을 이룬 조선의 임금이 되고 다음 세대인 임금을 책봉하려는 시기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태종의 아버지 이성계의 생각과 같이 피로 세운 조선을 손에 피 묻힌 이방원이 아닌 막내아들에게 세습을 하고자 했던 태조와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던 태종은 호탕하고 주색잡기에 빠져 있고 사냥을 좋아한 양녕대군이 아닌 책에만 파묻혀 사는 셋째 아들 충녕대군에게 세자를 세습한다. 아마 양녕대군이 태종 자신을 너무 닮은 나머지 대군이 임금이 된다고 생각하면 자신과 비슷한 성격의 임금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태평성대인 조선을 올바로 이끌어줄 임금은 책을 좋아하고 총명한 충녕대군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세종이 아직 어렸을 때 태종으로부터 양녕대군이 자주 꾸중을 듣고 부담감을 느끼며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느꼈을 부담감은 실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충녕대군의 느낌에서 그린 영화이다. 그런 충녕대군은 세자의 자리가 부담스럽기하고 고심 끝에 궁을 탈출하기로 마음 먹고 월담을 시도하는데 충녕을 꼭 빼닮은 덕칠이라는 노비와 담벼락에서 신분이 바뀌었다. 충녕대군의 입장에서는 평소 책만 좋아하고 운동을 하지 않는 등의 생활을 해온 삶에서 처음 하는 월담이 힘들었으며 일탈을 한번도 하지 않았던 평소의 충녕대군은 월담을 하는 하는 내내 손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저잣거리의 노비라니 궁궐에서 한번도 겪지 못했던 백성들의 삶을 경험해보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린 시절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책을 많이 읽어 생각이 깨어 있었던 그는 앞으로의 정치의 방법까지 생각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루 아침에 뒤바뀐 운명
충녕대군은 궁에 틀어박혀 책만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는 심약한 대군이다. 그런데 아버지 태종은 주색에 빠진 첫째 양녕대군을 믿을 수 없는 터라 결국 셋째 충녕대군을 세자에 책봉한다. 왕세자의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충녕대군은 답답한 궁을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담을 넘는 찰나 왕궁의 담을 넘어오던 남자가 자신과 닮은 것을 알아채고 충녕대군은 그 남자와 옷을 바꿔입고 달아난다. 충녕대군과 똑같이 생긴 노비 덕칠은 역적의 자손으로 몰려 궁으로 끌려간 아씨를 구하기 위해 술김에 궁궐 담을 넘는다. 호위무사 해구와 황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덕칠을 충녕의 자리에 앉혀놓지만 명나라 사신의 방문으로 금세 비밀이 들킬 위기에 처하고, 막상 밖으로 나간 충녕은 끔찍한 노비의 삶에 발목을 잡히고 만다. 한편 월담을 한지 한시간도 되지 않아 관아로 끌려가게 된 충녕대군은 월담을 한 것을 후회한다. 아무리 자신이 세자라고 주장해도 상대방에서는 어줍잖은 소리 하지 말라며 몽둥이로 쳐맞기만 한다. 더구나 맨날 고기만먹고 공부만 하던 충녕대군에겐 김치밖에 없는 밥상은 견디기 힘든 현실이다. 그러나 충녕에게도 희망이 있었으나 자신의 호위무사인 해구가 자신을 구하러왔다가 노비집단에 잡혀버렸다. 그래도 충녕대군을 데리고 노비집단에서 탈출은 성공하지만 궁궐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충녕대군과 함께 전국을 떠돈다. 온실속에 자란 충녕대군을 해구는 전국유람을 하며 배고프면 나무뿌리캐먹고, 밖에서 자고, 충녕대군이 똥을 싸면 똥도 닦아주고 업고 다닌다. 한편 충녕대군과 바뀐 노비는 나름 세자생활에 적응했는지 멋진옷, 맛있고 끝이 없는 음식, 원하는 여자는 전부 다 취할수있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한편 황희와 대립관계에 있던 신익대감은 세자가 이상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자체 조사하던 중 세자의 시비들이 세자가 체질이 변한 것 같다는 제보를 받는다. 추궁끝에 세자가 노비인걸 깨닫고 세자로 바뀐 노비를 왕으로 만든후, 자신이 세자로 바뀐 노비를 지배할 계획을 세운다. 한편 황희는 장영실을 데리고 다니면서 신기한 물건들을 만들고, 관아에서 곡식을 훔쳐다가 불쌍한 백성들을 구한다. 이런 황희의 언행을 보며 자신이 백성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 깨달은 충녕대군은 그 길로 궁궐로 돌아가 예의 없는 명나라 사신의 횡포를 되갚은 후 성군이 되어 간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지 두 달여 만인 태종 18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양위한다. 태종은 재위 기간 수시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위한다는 쇼를 벌이고는 했는데 신하들은 그때마다 찬 바닥에서 절을 하며 말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신하들은 '이번에는 또 얼마나 선위 파동이 오래 갈려나?' 했는데 태종은 세자에게 임금이 즉위식 때 입는 면복을 입혀 신하들 앞에 내보냈다. 당연히 왕의 복장은 왕만 입을 수 있었다. 선위를 반대하여 뜰에 나아가 엎드리던 신하들도 면복 차림의 세자를 보고 군말없이 조복으로 갈아입고 세종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이는 불안정한 셋째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태종 자신의 남은 여생을 쓰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 4년,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났다.
즉위 초의 상황은 세종이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는 태종의 신하들이 즐비하게 배치되어 있던 점 등 험한 길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던 중 죽은 태종에서 세종으로 권력이 옮겨지는 1가지 반전사건이 일어나는데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아버지가 만들었던 노비426명과 그 자손들까지 천명을 아들 김도련이 자기 소유 노비로 되찾겠다고 하며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노비로 뇌물을 주어 큰 문제가 되었던 사건을 세종8년, 1426년에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즉시 태종의 최측근이었던 조말생은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경도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하도록 명한다. 이를 계기로 조말생의 다른 죄들이 드러났으며 이 때 조말생이 노비 36명에 장물 780관, 현재 가치로 약 14억 원 남짓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조말생은 교형을 받을 뻔했으나 유배로 그치게 된다. 관리 17명이 노비 132명을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나자 세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자들에게 유배 혹은 파면 등의 처벌을 내렸다. 이로 인해 태종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울 수 있었다. 이듬해 1427년(세종 9년) 1월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키면서 세종은 본격적으로 성군으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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