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명장 이순신의 시작
1545년생인 이순신은 문관집안에 태어나 늦은 나이인 만31세에 비로소 1576년 무관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의 육군 무관으로 첫 임관하였다. 처음엔 육군이었다. 이후 1586년 두만강 하구에 있는 녹둔도로 임지를 바꾸어 재직하였고 재직 중인 1587년 9월의 여진족의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녹둔도전투에서 이겼다.
하지만 앞선 녹둔도전투에서 아군의 피해가 커서, 북병사 이일의 탄핵을 받고 백의종군하는 위치에 서기도 했다. 그 뒤 두번째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승전하여 복직하였다. 그 뒤 전라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쪽의 무관, 행정관 등을 역임했고 1589년 정읍현감 재직 중 류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가 되고, 절충장군, 만포진첨사, 진도군수 등을 거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만나게 되었다.
위의 사실대로 보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까지 16년간의 군에서의 승전경험을 지니고 있었고 이순신장군 스스로도군법을 중히 여겼으며 위로는 임금을 귀히 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귀히 여기는 민본주의의 최고봉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라좌수영에서의 준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준사의 어떤 것을 위한 전쟁인가에 대해 이순신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고 답하는 장면에서는 한없이 당당하고 한없이 불의에 항전하여 싸울 위인으로 그려지는 반면 여수에 들어서는 끝없는 백성들의 피난행렬을 보면서 이 백성들을 한없이 끌어 안고 지키려는 마음이 전해져 이순신장군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전투, 위대한 시작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왜군이 부산성에 쳐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이로부터 20일만에 한양이 점령당하고 파죽지세로 선조를 따라 북상하게 된다. 이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조선군의 사기가 떨어지는데 이순신은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바다위에서 싸울 것임을 선포하고 꿈에서 영감을 얻은 이순신은 다수의 판옥선으로 바다위의 성을 쌓아 수성전을 할 계책을 얻는다.
부산성에 위치한 와키자카에게 가토의 함대가 전력을 보태려 합류하고 있었고, 가토와 견원지간이었던 와키자카는 가토의 함대를 빼앗고 자정을 기해 이순신이 당포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고 견내량을 향해 출정한다. 이순신장군은 왜군이 견내량에 매복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서 싸워야 한다는 방책을 이야기하지만 원균은 이를 거절한다.
그날 밤 이순신은 학익진의 위치를 완성하고 새벽이 되자 함대를 출진시킨다. 안개가 자욱한 견내량 이순신장군은 왜군을 유인하기 위해 어영담이 지휘하는 함선3척을 보내서 유인을 시도하지만 발각되고 포탄이 바닥난 어영담이 위기를 벗어나 견내량 밖으로 왜군을 유인한다.
이미 학익진을 경험한 와키자카는 진법의 약점인 돌파를 하려는 찰나, 뒤에서 진군하고 있던 거북선에 의해 돌파가 무산되고 거북선의 취약점을 이미 알고 있던 와키자카는 거북선에 집중공격을 명령하고 거북선 2척이 침몰한다. 개량한 거북선 1척은 배의 높이를 낮게 건조하여 공격을 모두 빗겨 맞고 진영의 한복판에서 사방으로 포격을 하며 왜선들을 격파한다.
거북선의 활약으로 안정을 찾은 이순신의 함대는 함대의 모든 함선에게 선회를 지시함과 동시에 일사분란하게 선회를 하여 바다위의 성이 완성하고 와키자카의 함대에 일제사격을 명하여 와키자카의 함대를 기함만을 제외하고 전멸시키고 최후로 와키자카의 기함에 집중발포되어 한산도 앞바다에 수장된다.
한산도대첩과 임진왜란
일본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계획대로 육군은 육지를 통해 북쪽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가되, 수군은 식량이나 무기와 같은 군수품은 바닷길을 통해 공급받을 계획이었다. 그러면 일본군의 함선이 남해안을 거쳐 서해로 올라가야 하는데, 한산도 대첩에서 조선 수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바닷길이 막히게 되었다.
또한 전라도 지역에 주둔중인 조선의 육군과 남해를 지배하고 있는 조선 수군이 언제든 뒤를 공격할 수 있는 불안감과 북쪽으로 진격해 명을 정벌하려는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다. 한산도 대첩은 전쟁 상황을 바꾸어 놓은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육지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던 일본의 기세가 크게 꺾였고 조선은 다시금 대열을 정비해 일본과 맞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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